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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선생 업적 통해 정체성 조명

북가주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과 업적을 조명해보는 시간이 마련됐다. 한인 단체인 ‘북가주 공감’이 도산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를 초청해 개최한 강연회를 통해서다. 이날 강연회는 지역 한인 100여 명이 참석했으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찾은 가족 참가자들이 많았다. 필립 커디씨는 이날 강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도산 안창호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정진사상과 교육개조를 주장한 사회사상가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이라며 “특히 안창호 선생은 교육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무실, 역행, 충의, 용감 등 안창호 선생의 4대 정신을 배양하도록 했다. 흥사단을 설립한 것도 이런 이유”라고 설명했다. 커디씨는 “미국에서도 도산 선생의 뜻을 기려 LA에 우체국과 인터체인지에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명명했다”며 “절반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는 할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앞으로 그의 사상이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커디씨는 그동안 보관해온 안창호 선생과 관련된 사진들을 하나 하나 보여주며 미주 한인들의 역사를 설명했고, 특히 샌프란시스코 오크 스트리트에서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와,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 등 북가주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들도 자세히 소개했다. 또 안창호 선생의 큰 아들이자 할리우드 배우로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던 필립 안은 물론 자신의 어머니인 안수산 여사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필립 커디씨는 또, 한국정부가 안창호 선생과 관련돼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커디씨는 “이승만 정권이 남한에 들어서며 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활동을 축소 왜곡했다”며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미주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 역사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최근 공개된 국정교과서에서도 관련 내용이 잘못 기재되는 등 한국정부는 이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필립 커디씨는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서 한국으로 떠나며 가족들에게 좋은 미국 시민이 되라, 하지만 한국인이라는 뿌리는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며 “이 말은 우리 가족뿐만이 아닌 미국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도산의 사상을 연구하며 살 것”이라고 밝혔다. 안창호 선생의 장녀인 안수산 여사와 아일랜드계 이민자인 프랭클린 커디씨 사이에서 태어난 필립 커디씨는 LA 미주한인 역사박물관 사무총장, 미주도산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의 독립기념관에서 도산 선생 연구를 맡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학교 등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도산의 업적을 기리는 디지털 도서관 구축 활동도 펼치고 있다. 최정현 기자

2017-02-06

'파차파 캠프' 한국 민주주의 씨앗 뿌려진 곳

작년 12월 6일 리버사이드 시의회가 '파차파 캠프'를 미국 최초의 한인촌으로 인정, 사적지(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 지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승인을 받는 데 일조했던 UC리버사이드의 장태한 교수는 “파차파 도산 안창호의 미주 생활과 활동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곳"이라며 "리버사이드 시의회가 리버사이드 한인촌 (파차파 캠프)을 사적지로 지정하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 싶다"며 글을 보내와 이를 소개한다. ◇파차파가 관심 받지 못했던 이유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미주 한인사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에서도 제외 되어왔다. 도산 안창호 전기 그리고 논문에 리버사이드는 거의 언급이 되고 있지 않거나 '하변'에 거주했다고는 간단한 소개가 있을 뿐이다. 이번에 새로 발굴된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미주 한인사, 독립운동사, 그리고 리버사이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미주 한인사를 다시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리버사이드 파차파캠프는 도산의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로 인정 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도산 안창호의 지도력과 초기 한인들의 성실과 노력으로 형성되었고, 이들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함께 이루어 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는 1904년 3월 23일 리버사이드에 도착했다. 도산은 미국 전역과 세계를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도산 가족은 1913년 12월까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미주 최초의 한인촌 건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07년 2월부터 1911년 9월까지 한국에 체류하면서 신민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했다. 1911년 9월 미국에 다시 돌아온 후 도산은 가족들이 거주하는 리버사이드에 정착했다. 이후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1911년 11월 22일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되었다. 신한민보는 대한인국민회 창립이후 최초로 모든 지방회 회장들이 참석했고, 이때 밤샘 회의는 12월 4일까지 지속되어 독립운동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의 리버사이드 활동이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도산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며 1905년 친목회를 공립협회로 발전시켰지만 그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 두었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되었을 때도 발기인들의 상당 수는 리버사이드 거주자들이었지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있었다. 또한 도산은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에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대의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후 도산과 그의 가족은 1913년 12월 LA 이주하면서 로스앤젤레스 회원 자격으로 활동했다. 이처럼 도산의 가족은 리버사이드에 적지 않은 기간동안 거주했지만,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대의원 자격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리버사이드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곳 그러나 도산은 1905년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공립신보를 발간했으며, 1906년 신민회 발기 또한 리버사이드에서 했다. 1911년에 한국에서 돌아온 후 대한인국민회 총회도 리버사이드에서 열렸고, 흥사단 창립 (1913) 당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었다. 또한 1913년 미국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 브라얀이 "미주 한인은 일본의 식민국민이 아님"을 선포하였던 것을 계기로 미주 한인들의 법적 지위가 비공식적으로 인정 되었던 헤멧 벨리 사건의 주역들 역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거주 한인들 이었다. 필자는 2003년 이선주 목사가 발표한 "리버사이드에서의 도산 안창호의 활동" 논문을 읽고 리버사이드 한인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목사는 파차파 캠프, 안도산 공화국으로 불렸던 리버사이드의 한인촌을 미주 한인 사회 최초의 코리아타운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리버사이드에 민족공동체가 형성 되었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즉 도산의 리더십으로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자체적으로 규율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했으며, 동시에 도산 공화국으로 불리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 가치를 위한 재조사 이선주 목사는 또한 도산이 왜 리버사이드로 이주 했으며 어떠한 활동을 전개했는지 아주 자세히 소개하면서 도산의 리버사이드 생활을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리버사이드 한인촌은 도산 안창호에게 1) 안정된 가정생활의 터전을 제공해 주었으며 2) 직업소개소를 설립하여 한인들에게 취업을 알선하고 한인공동체 형성의 기반을 닦았으며 3)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한 친목회를 리버사이드에서 공립협회로 개편 및 발전 시켰고 4) 1907년 4월 한국에서 창립한 대한인신민회는 리버사이드에서 발기 했으며 5) 1911년 도산은 리버사이드로 다시 돌아와 대한인국민회를 해외임시정부로 강화 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6) 젊은 세대의 교육과 계몽을 위해 흥사단을 조직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한할 근거나 구체적인 자료는 제시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자는 신한민보, 리버사이드 지역 신문, 그리고 리버사이드 캘버리 장로교회 자료 등을 찾기 시작했고 자료들을 통해 의문들을 하나 둘씩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을 푸는 것처럼 자료를 하나 하나 발굴하면서 그 당시 한인촌 형성 과정을 맞추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들을 마주하면서 희열을 느꼈다. 논 문이 완성되어갈수록 '아 이것이구나!' 하는 자신감과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름으로 리버사이드 시에 사적지 신청서를 제출했고 1년여간의 심사를 거친 후 2016년 6월 15일 리버사이드 시 문화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라는 결과를 얻었다. 리버사이드 시 의회에서 최종 통과 또한 순조로울 것으로 예상했다. ◇독립 운동사 다시 쓰는 계기 파차파 캠프의 건물이나 유물들이 보존되지 않아서 역사 유적지로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리버사이드 시는 에서 파차파 캠프를 미주 한인 최초의 한인촌으로 인정하는 문화 관심지 (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로 지정하는 시 조례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는 초기 미주 한인사와 도산 안창호의 독립 운동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처럼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초석을 다진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지역이다. 필자가 발굴한 새로운 자료와 사료들을 통해 파차파 캠프 또는 도산 공화국으로 불린 리버사이드 한인촌이 미국 최초의 한인 타운이며, 도산 안창호 미주 독립운동의 메카라는 것을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으로 민족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한인촌이 유지되고 발전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리버사이드 한인촌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사적지 지정과 함께 자녀들에게 알려 주면서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면 좋겠다.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2017-01-03

"미주 최초 한인촌 지정 자랑스럽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4년 리버사이드에 건립한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가 사적지로 지정됐다. 리버사이드 시의회에서 특정 지역을 문화 사적지로 지정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리버사이드 시의회는 지난 6일 열린 정기 회의에서 112년 전 파차파 캠프가 세워졌던 곳(1532 Pachappa Ave.)을 '리버사이드 문화 관심지 1호(City Point of Cultural Interest #1)'로 지정하는 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시의회는 도산이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날(1904년 3월 23일)을 기념해 내년 3월 23일 현판식도 실시할 예정이다. 이날 회의에는 미주도산기념사업회 홍명기 총회장과 도산의 막내아들 랠프 안(91.한국명 안필영)씨, UC리버사이드 산하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의 장태한 소장을 비롯해 LA총영사관의 이재훈 영사, 캐서린 구디스 UC리버사이드 역사학과 교수, 제임스 나 치노밸리교육구 위원장, 오렌지.샌디에이고카운티 평통협의회(OC.SD평통)김성우 위원 등이 참석해 파차파 캠프의 문화 사적지 지명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또 시의회에서는 애린 게티스 역사보존 담당관이 나와 지난 6개월 동안 조사한 1900년대 초 미주 한인사회 연구 조사 결과와 '파차파 캠프'에서 결혼.출생.사망 등 실생활이 있었던 한인 집단 거주지를 증명하는 동영상과 자료를 제시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해 승인과정을 지켜본 홍명기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총회장은 "리버사이드 시의회가 '파차파 캠프'를 미주 최초 한인촌임을 인정해 자랑스럽고 동시에 막대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이번 일을 위해 인랜드 지역 동포들이 하나가 되어 파차파 캠프가 사적지로 지정될 수 있도록 지지하고 목소리를 내줘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홍 총회장은 이어 "파차파 캠프야말로 도산 정신을 담은 메카로서 차세대들에게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곳"이라며 "또한 미주동포사회는 물론 전세계 720만 해외동포들에게도 이민사의 메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파차파 캠프는 1902년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 선생이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후 한인들과 함께 살던 집단 거주지다. 도산 선생은 1880년 중국인 철도 노동자의 임시 거주지였던 2.96에이커 부지의 이곳에 한인회관과 17동의 주거시설을 갖추고 귤농장 한인 노동자 30여 가구 70여 명과 지냈다. 일명 '도산공화국(Do San Republic)'으로도 불리던 이곳은 1908년 발간된 뉴욕 샌본지도회사의 보험용 지도에 '한인거주 지역(Korean Settlement)'으로 1937년까지 표기됐었다.

2016-12-14

도산 안창호 선생 건립 최초 한인촌 사적지 지정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4년 세운 리버사이드 한인촌 '파차파 캠프'가 사적지(Historic Site)로 지정됐다. 리버사이드 시의회 산하 문화위원회는 6일 시의회 회의실에서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안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리버사이드 시는 남가주 최초 한인촌인 파차파 캠프 건립 장소에서 내년 3월23일 사적지 지정 기념식을 열고 한인 이민역사를 기념할 예정이다. 파차파 캠프는 1904년 도산 선생이 리버사이드다운타운에 세운 한인촌이다. 당시 오렌지농장에서 인부로 일하던 한인 10여 가정의 50여 가족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곳이다. 당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 지역은 1880년대 중국계 철도 노동자 이주를 시작으로 한인들이 자리잡은 곳이다. 이곳에서 도산 선생은 한인 노동자와 함께 근면성실을 실천하고 조국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이날 시의회 회의실에서 도산 선생의 막내 아들 랄프 안(91)과 미주도산안창호 기념사업회 홍명기 총회장이 사적지 지정을 지켜봤다. 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은 "도산 선생은 리버사이드 한인촌에서 신민회와 흥사단 활동 등 미주 독립운동 초석을 다졌다"라며 "파차파 캠프 사적지 지정은 미주 한인사회의 자랑스러운 날"이라고 말했다. 김형재 기자 kim.ian@koreadaily.com

2016-12-06

도산 우체국, 주상복합 호텔로 바뀐다

LA한인타운의 상징 중 하나인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10층 주상복합건물로 바뀌게 생겼다. 로컬 부동산 개발업체 어반 커먼스(Urban Commons)는 6가와 하버드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 우체국(3751 W. 6th St·사진) 자리에 주거용 유닛 44개와 객실 200개를 갖춘 10층 높이 주상복합건물로 개발하겠다는 서류를 LA시 개발국에 최근 접수했다. 이 개발안에 따르면, 44유닛 아파트는 1·2베드룸으로 구성되며 1층과 2층에는 1만8000스퀘어피트 크기의 상가도 들어선다. 또 지하 3층 규모의 주차장도 지어진다. 하지만 이 계획은 현존하는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고 신축하는 프로젝트라서 승인될 경우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현 건물 소유주는 UCCH LLC로 올해 5월 한인 소유주로부터 1400만 달러에 매입했다. 우체국 건물의 면적은 1만6854스퀘어피트이며 대지는 3만4589스퀘어피트 규모로 현재 연방 우정국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2017년 8월이 지나면 우정국과의 임대계약도 종료되는 데다 조닝도 상업용인 C2여서 인수 업체가 주상복합건물을 개발할 것으로 예상해왔다. 하지만 현 소유주가 우체국 건물을 철거하고 상업용 건물을 개발하려면 우정국이 장소 이전에 대해 동의해야 하고 우체국 폐쇄에 반대하는 지역주민과 시정부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재개발 추진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진성철 기자

2016-11-24

'오렌지 따는 도산' 동상으로 바뀐다

리버사이드 시청 앞 광장에 있는 도산 안창호 동상을 교체하는 작업이 한걸음 진전됐다. 미주도산기념사업회(총회장 홍명기)는 지난 15일 오후 리버사이드에 있는 한국회관에서 열린 제2차 정기 이사회에서 김선희 작가가 제출한 동상 리모델링 디자인을 잠정 채택했다. 새 동상은 도산이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모습이다. 이사회는 이날 제출된 3개 디자인을 비교 검토한 후 표결을 통해 다수결로 김 교수팀의 디자인을 선정했다. 이사회는 디자인에 대한 동포사회의 공청회를 거쳐 설계도가 확정되는 대로 시당국과의 협의 과정을 밟게 된다. 홍명기 총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2001년 도산 동상 건립 당시 재미 한인 동포 사회는 한목소리로 기념 사업을 적극 지원한 바 있다"며 "이번 리모델링 사업에 대해서도 일치된 커뮤니티 후원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만큼 도산 유족과 동포사회와 원활하게 소통해 사업을 점검하고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이사회에는 총 14명의 이사가 참석해 도산기념동상 리모델링 디자인 공모 접수 진행 과정 및 현황 외에도 ▶3월 10일 도산 서거 78주기 추모식 ▶6월 안수산 여사 서거 1주기 추모식 ▶8월13일 동상건립 15주년과 8.15 광복절 기념식 및 파이어니어 후손 오찬 행사 등 그동안 진행된 주요 행사 및 사업내용을 보고 받았다. 또 회계보고 시간에는 홍 총회장이 25만 달러 약정금 중 5만 달러를 지급했으며, 애리조나주에 거주하는 김건선.경라 부부가 3000달러, 장봉수 이사가 2000달러를 각각 기부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도산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가 도산 관련 사업의 주도권을 주장하며 반대하고 있어 변수다. 한편 김영옥연구소는 이날 1900년대 초 리버사이드에 형성된 최초의 한인촌에 있던 한인교회 교인 명단과 묘비 주인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공개했다. 또 1911년도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회의 후 찍은 단체사진과 이에 관한 신문기사 등을 담아 제작한 동영상 '도산공화국'을 상영하기도 했다. 황인국 기자

2016-09-21

인랜드한인회, 도산 '온라인 홍보' 지원한다

인랜드한인회(회장 데이비드 곽)는 한국 독도를 알리고 동해 표기에 앞장서 온 민간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단장 박기태)와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한국어와 영어 동영상을 제작하고 이를 유튜브를 통해 홍보하는 데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인랜드한인회에 따르면 한인회측은 리버사이드를 방문한 반크 21세기 신헤이그 LA특사팀과 만나 이러한 내용에 대해 협의했다. 또 미국 교과서는 물론, 세계지도와 웹사이트에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됐거나 한국의 역사가 왜곡된 내용을 공동으로 조사 및 발굴하여 시정 노력을 하는 등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외에도 미국의 한인 차세대들과 반크 회원들이 함께 한국 홍보 캠페인을 공동으로 전개한다는 데에도 뜻을 모았다. 이날 업무협력 간담회에 함께 했던 미주한인총연한인총연합회측도 10월에 열리는 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전세계 한인회장들을 대상으로 독도와 한국을 홍보하는 세계지도, 한국지도를 반크에서 제공받아 알리는 캠페인 추진을 고려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반크 21세기 신헤이그 LA 특사팀은 지난달 LA에 도착한 후 리버사이드시에 있느 도산 선생의 동상을 참배했으며, 마틴 루터킹, 간디 동상과 함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이 리버사이드시에 설치된 과정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황인국 기자

2016-08-31

[브리핑] 20일 도산선생 세미나 외

20일 도산선생 세미나 미주3·1여성동지회(회장 홍순옥)가 '도산 안창호 선생에 대해 알아야할 10가지(Top 10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Dosan)'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내일(20일) 오후 6시30분 LA한인타운 인근 굿사마리탄병원(Moseley-Salvatori Conference Center, 637 Lucas Ave.)에서 개최한다. 세미나에는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이를 사랑하라'는 도산 정신과 리더십이 담긴 책(Love Yourself, Love Others)을 번역하고 도산 선생의 딸 고 안수산 여사의 저서 '버드나무 그늘 아래'를 집필한 존 차씨와 도산 선생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가 강연자로 나온다. 참가비는 간단한 저녁식사를 포함해 10달러, 책 구입 시에는 25달러다. 티켓은 웹사이트(https://goo.gl/05YpYY)에서 구입할 수 있다. ▶문의: hapa61-sac@yahoo.com 21일 KABA 조인트믹서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가 세계한인법률가회(IAKL)와 함께 21일 오후 6시30분 LA한인타운 카페 라 부(Cafe La Vue, 3855 Wilshire Blvd.)에서 조인트 믹서를 진행한다. 이는 9월 29일~10월 2일 워싱턴DC JW매리엇에서 열리는 '제 24차 세계한인법률가회 총회 및 학술대회'를 앞두고 한인 법조인간 네트워크를 쌓고 KABA 소속 변호사들의 총회 참석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IAKL은 매년 총회를 열고 있으며 한 해는 한국에서, 다른 한 해는 미국을 포함한 해외에서 개최하고 있다. 행사 참석은 무료이며 예약(kabaconsultant@gmail.com)하는 것이 좋다. ▶문의: (323)801-7987 21일 KIWA 회원모임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소장 서승혜)가 21일 오후 6시30분 연대의 집(1053 S. new Hampshre Ave., LA)에서 한국어 회원모임을 한다. 이날 모임에는 비영리 및 지역사회 단체를 위해 건축 기술을 적용해 적은 비용으로 건물 개조를 개선해온 건축한 전공 학생 엘리스 안·줄리아 백씨가 나와 건축학 실습을 한다. 또 서류미비자 구제를 골자로 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차 이민개혁 행정명령(DACA +, DAPA)에 대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이민사회에 끼치는 영향, 경찰 저격 사건 및 경찰 항의 시위가 한인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설명한다. 모임은 무료이며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예약하는 것이 좋다. ▶문의: (213)738-9050 22일 웨스트힐장로교회 공연 웨스트힐장로교회가 22일 오후 7시30분 이 교회 본당(23350 Welby Way, West Hills)에서 남성중창단 유엔젤보이스 초청 공연을 연다. '클래식계의 아이돌'로 불리는 유엔젤보이스는 이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주제로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공연은 무료이며 교인 뿐만 아니라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웹사이트(iwhpc.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의: (818)884-2391 정리=이재희 기자

2016-07-18

[추모의 글] 도산의 딸 안수라 여사를 추모하며

도산 안창호의 둘째 딸로 태어나 LA에서 한 세기를 자랑스럽게 살아온 안수라 여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99세를 일기로 지난 6월 18일 별세, 오는 7월 10일 장례식 후 그렇게 존경하던 큰 오빠 안필립(영화배우·도산의 장남) 곁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안수라 여사는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여사 사이에 3남 2녀 중 둘째 딸로 1917년 다운타운 흥사단 단소에서 출생했다. 아름다움에 조용한 성품을 지녔고, USC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가 순국한 후 어려서부터 집안의 경제문제를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196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효녀로 가장 가깝게 모셨다. 무엇보다도 안수라 여사는 1954년 오빠와 언니, 동생과 마음을 모아 파노라마시에 중국식당 문게이트(Moongate)를 오픈, 40년 동안 성공적으로 경영을 했다. 어머니 이혜련 여사의 생일 때마다 흥사단, 국민회, 여자애국단 단우를 초청해서 자주 잔치를 베푼 곳이 바로 문게이트였다. 한국의 흥사단 임원들이 LA를 방문할 때마다 꼭 찾았고, 파노라마시의 최고 식당으로 자리를 잡았다. 안수라 여사는 미국 방송인과 결혼, 행복한 가정을 꾸몄고, 무엇보다도 5남매와의 우의를 가장 중요시했다. 항상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안수라 여사는 말수가 적었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따뜻한 마음에다 늘 자상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 했다. 도산 안창호가 빙그레 웃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항상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인 딸이 바로 안수라 여사였다. 한인사회 주요 행사 때에는 막내동생 안필영씨와 자리를 함께 했다. 아버지 도산 안창호가 세운 대한인국민회의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 옛 친지들을 반갑게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리고 2014년에는 어머니가 평생 사용하던 재봉틀과 고이 간직해온 아버지의 서신, 책, 사진 등을 한국 도산기념사업회에 영구 기증했다. 안수라 여사는 천수를 누리고 이제 우리 곁을 떠났다. 도산의 딸로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운 삶은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버지 도산이 돌아가신 후 가정의 경제를 책임졌던 자랑스러운 둘째 딸. 언제나 빙그레 웃던 안수라 여사를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2016-07-03

[기고] 다시 생각하는 도산의 '주인 정신'

오늘(10일)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한 지 78주기를 맞는 날이다. 도산은 인격적인 지도자이면서 혁명가이자 교육자였고 민족의 위기에 방향을 제시했던 사상가였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설계했고 대한민국의 비전을 계획했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아시아의 평화와 세계와의 공존공영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몸소 실천했다. 도산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그의 업적은 과거의 일이지만 인격과 사상은 아직도 우리 민족에게 남아 있는 위대한 유산이다. 지금 한국과 주변 국가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도산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민족의 분단은 고착화돼 가고 남북간 갈등은 전쟁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 최근에는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골이 더 깊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동북아시아 정세는 더욱 불안해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민족으로서 통일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명을 갖고 있다. 한국은 민주화에 이어 정보산업의 발전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팽배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한 둘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가치관을 심어 줌으로써 장차 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역량을 키우게 해야 한다. 또 인성과 창의성에 바탕을 둔 교육으로 청소년들의 품격을 높이고 세계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해야 한다. 지금 지구촌은 자원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핵 전쟁의 위협 등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 인류 문명의 위기다. 이런 상황에서 도산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헌신적인 리더십이 더 생각난다. 도산은 60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번영만 생각했다. 둥근 돌이나 모난 돌이나 다 쓰임새가 있다고 강조하고, 분열된 조직과 이념을 조화롭게 화합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단체와 사업을 일으켜 힘을 길러 민족의 미래에 거름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건전한 인격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순국 78주기를 맞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도산의 주인 정신이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도산에 의하면 주인정신은 독립정신과 책임정신이다. 우리는 오대주인(五大主人)이 되어야 한다. 첫째로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요, 둘째는 내 가정의 주인이요, 셋째로 나의 마을의 주인이요, 넷째로 내 직장의 주인이요, 끝으로 내 나라의 주인이다. 일제시대에 우리는 나라의 주인 구실을 못하는 가짜 주인이었다. 주인 구실 할 줄 아는 주인이 참된 주인이요, 진짜 주인이다. 한 집에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은 남에게 빼앗기고 만다. 우리는 당당한 독립 능력과 용감한 책임정신을 지니는 주인다운 주인이 되어야 한다." 주인 정신이 한국인 모두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이 정신이 바로 도산이 그토록 강조했던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의 정신이다. 고국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숨결이 흐르는 조국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지금의 한인사회를 있게 한 원동력은 이민 선조들의 피와 땀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도산의 애국, 애족, 애민의 철학과 삶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의 뜻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도산이 항상 강조했던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얼굴'로 품격있는 한인사회를 만들어가야겠다.

2016-03-09

애국지사 후손들, '아버지 도산' '할아버지 김호'를 말하다

미주 독립지사들의 삶을 후손들을 통해 듣는 뜻깊은 행사가 LA에서 열린다. 격랑치는 역사속 인물 이전의 아버지로서, 할아버지로서 인간적인 모습들이 소개된다.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이사장 권영신)은 광복회 미서남부지회(회장 배국희), 한인 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 공동 주최로 10일 '애국지사 후손 초청 독립운동 강연회'를 개최한다. 행사일인 10일은 도산 안창호 순국 78주년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일 남가주 대표 한인단체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여 연합 개최한 3.1절 기념식의 감격을 이어가자는 의도도 있다. 강연회 연사는 도산의 막내아들인 랠프 안, 김호의 외손자 스튜어트 안, 송헌주의 증손자 마크 김 판사, 전명운 의사의 사위인 표한규씨 등 4명이다. 대한인국민회의 권영신 이사장은 "미주 대표 독립유공자 후손 4명이 한자리에 모여 연설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연설 내용은 행사 부제대로 '우리 집안 독립운동을 말하다'다. 민병용 관장은 "그들의 인간미를 소개해 역사책속의 인물이 아닌 지금도 살아 숨쉬는 '미주 독립운동의 정신'을 알리고자 했다"고 취지를 전했다. 민 관장의 설명대로 미주 독립운동사를 아는 한인들은 드물다. 랠프 안은 아버지 도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도산이 1926년 미국에서 상해로 가던 그해 태어났다. 도산은 1938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2차례 옥고를 치르느라 생전에 막내 랠프를 안아보지 못했다. 90세 백발이 된 막내 아들이 전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민자라면 공감할 이야기다. 스튜어트 안의 외조부 김호는 '김브라더스'라는 과일회사 공동 설립자로 1920~30년대 큰 돈을 벌어 미주 독립운동 조직과 모금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영문 이름을 따서 LA한인타운에 세워진 학교가 '찰스 김 초등학교'다. LA카운티법원 마크 김 판사의 증조부 송헌주는 1907년 광무황제의 밀명을 받은 '헤이그 밀사'들의 통역관으로 네덜란드에 동행했다. 표한규씨의 장인 전명운 의사는 1908년 3월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친일외교관 듀함 스티븐스 저격에 장인환과 나선 의열투사다. 이 저격사건을 계기로 미주에서 독립운동이 본격 확산됐다. 후손들이 전하는 한인 선조의 뜨거운 애국심은 10일 오후 6시 옥스포드 팔래스 호텔에서 들을 수 있다. 2부 행사에서는 '미주 독립유공자 전집'의 저자 민 관장의 강연도 예정됐다. ▶문의:(213)321-0884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16-03-07

[시론] 3·1절에 생각하는 도산의 '독립전쟁론'

"나라를 위하여 몸을 버릴 때가 오늘이오, 피 흘릴 때가 오늘이라." 1905년 리버사이드에서 창립된 공립협회는 독립전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동포들에게 독립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공립협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강, 임준기 등 리버사이드 한인촌에 거주하고 있던 인사들과 함께 창립했다.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리버사이드와 레드랜드 등에 지방회를 둔 초기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론에 반대하여 '점진적 실력 양성론' 또는 '민족개량주의자'의 온건주의 노선을 주장한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이 적과 대치할 때는 적을 파괴할 전쟁이 필요하다는 독립 전쟁론을 주창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10년 7월 중국 청도에서 안창호, 이갑, 신채호, 이강 외 여러 명이 모임을 갖고 민족운동 방향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도산 안창호의 동지이며 평생 독립운동을 함께한 이강은 이때 "밀산현에 있던 미군이 경영하는 땅을 사서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하면서 사관학교를 운영하자"는 논의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안창호를 비롯한 민족운동가들은 1908년 이후 의병전쟁이 점차 쇠퇴하고 군대도 해산되는 상황을 보면서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즉 안창호는 현실적으로 힘의 열세를 절감하면서 전면적인 독립전쟁론에서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작전을 변경하게 됐고 1909년 설립된 대한인국민회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중요한 단체가 된다. 또한 한국으로 돌아가 신민회를 조직한 도산 안창호는 해산된 군인을 대신할 군인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운동 기지 창건운동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해 러시아의 항구 '해삼위'에 독립운동 기지 개척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이명화 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북미의 공립협회가 최고 사령부가 되어 국외 각처에 기지를 개척하여 한인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던 거대한 플랜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처럼 도산 안창호가 무장투쟁을 반대하며 그 세력과 대립했다는 지금까지의 학계의 주장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독립전쟁론을 지지했으며 군인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의 필요성도 인정해,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외세의 견제와 방해로 이 같은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 안창호는 한국과 멀리 떨어진 지리적인 여건과 국권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은 독립전쟁을 수행할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대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각자 교육을 받고 실력을 양성해 장기적인 독립항쟁과 독립전쟁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밀담으로 한반도의 미래가 결정되고 있는 현실에 도산 안창호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16-02-29

[동부] "도산정신으로 미국사회 리더 돼라"

인랜드한인회(회장 데이비드 곽)와 주니어한인회가 공동 주최한 '제2회 홍명기 회장배 인랜드 차세대 볼링대회'가 지난 20일 리버사이드 소재 AMF볼링장에서 홍명기 회장, 김재권 미주한인 총연합회 회장, 제임스 나 치노힐스교육구 교육위원장 등 한인 사회 인사들과 인랜드지역 5개 대학을 비롯, 교회, 청소년 문화단체 등 총 15개팀 2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데이비드 곽 회장은 개회사에서 "지역의 차세대들이 학교, 종교와 관계없이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교제하고 네트워킹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한인 사회를 돌아보게 하고 싶어서 이번 행사를 기획하게 됐다"고 개최 취지를 설명했다. 홍명기 회장은 "이렇게 많은 차세대들이 함께 교제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큰 희망을 갖게 됐다"며 "최초의 한인사회인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는 자부심으로 도산 정신을 따라서 미국 사회의 당당한 리더들로 성장하리라 기대한다"고 축하했다. 이날 함께 참석한 김재권 회장도 "미주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랜드 한인회가 매번 독창적인 기획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특히 많은 차세대들이 애국가를 이렇게 정확하게 따라 부르는 것은 평소에 차세대 교육이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 지 알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이날 대회 결과를 살펴보면, 상패와 장학금 500달러가 주어지는 '단체전 1등'엔 리버사이드 침례교회 EM 학생팀이, 상패와 장학금 300달러인 2등은 리버사이드 SDA 교회 KM 학생팀, 상패와 장학금 100달러인 3등에는 리버사이드 SDA 교회 EM 학생팀이 차지했다. 또한 최다단체 참가상은 38명이 참가한 리버사이드 SDA 교회 KM & EM이 받았으며 개인전 남녀부 1등은 이종원·유진선(상패와 장학금 300달러), 남녀부 2등은 이용민·홍지혜 (상패와 장학금 200달러), 남녀부 3등은 헨리 김·임진·홍예나(상패와 장학금 100달러)가 수상했다. 또한 주니어 상은 1등에 이종원, 2등 피터 김, 3등은 제임스 김 군이 받았고 격려상엔 김하나 양이 수상해 장학금을 수상했다. 황인국 기자

2016-02-24

도산 동상 오렌지 작업복으로 바꾼다

리버사이드 시민광장에 설치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양복입은 모습의 동상이 오렌지를 수확하는 작업복 모습으로 바뀔 전망이다.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총회장 홍명기)는 11일 리버사이드 소재 한국회관에서 17명의 이사가 참석한 가운데 '2016년도 제1차기념사업회 총회'를 열고 도산 동상 교체를 포함한 주요 안건을 통과시켰다. 홍명기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도산 동상건립 15주년을 맞아 도산동상 교체와 추후 기념관 건립 등을 계획하고 있다"며 이사들의 단합된 모습과 헌신적 참여를 부탁했다. 2001년 리버사이드 시민광장에 세워진 도산 동상(당시 제작비 40만달러)은 존경의 의미로 정장 차림으로 제작됐으나 이를 도산이 오렌지를 따는 모습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홍 회장은 "안수산 여사에 따르면 도산은 오렌지를 정성껏 따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며 한인 농장 근로자들에게 정직ㆍ근면ㆍ애국을 고취시켰기에 후세들에게 교육적 측면에서 오렌지 따는 동상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피력해왔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나도 안수산 여사와 생각이 같다"며 "가능한 1~2년 안에 교체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비용 50만달러의 절반을 매칭펀드로 기부하겠다고 약속하고 나머지는 한국보훈처, 재외동포재단과 일반 모금으로 비용을 조달하겠다고 말했다. 잔 서 사무총장은 이날 '도산동상제막 15주년 비전사업추진안'을 주요 안건으로 제시했으며 동의와 재청을 거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외 통과된 주요 내용은 ▶독립운동의 산실인 만큼 위치에 걸맞는 동상을 세운다 ▶한인들의 의견을 청취한다 ▶기존동상은 폐기치 말고 기금을 받고 LA나 타주에 교육용으로 보낸다 ▶모든 기금후원자의 이름을 금액에 차이 없이 똑같이 새겨넣는다 ▶늦은 시간에도 볼 수 있도록 야간조명을 설치한다 등이다. 아울러 광복 71주년 및 도산동상 제막 15주년 연례 기념식을 8월13일 열기로 했다. 황인국 기자

201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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